2026-02-13

말(馬)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는 중한 양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왔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풍부하고 다채롭다. 이번 호에서는 말과 관련된 양국 문화가 지닌 전통과 의미를 짚어보고, 그와 관련된 전설적 이야기들을 통해 그 독특한 매력을 조명하고자 한다.
말과 관련된 중국의 역사와 문화
중국은 최소 4000여 년 전부터 말을 길들여 기르기 시작했다. 상(商)나라 갑골문에는 ‘마(馬)’, ‘어(馭)’, ‘기(騎)’ 등의 글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기마와 마차 운용 기술이 상당히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상서(尚書)>에는 복희씨(伏羲氏) 시대, 용마(龍馬)가 하도(河圖, 천지의 이치를 담은 신비한 도안)를 등에 지고 나타나 팔괘(八卦)의 탄생에 영감을 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연유로 말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중국인들에게 지혜의 사자(使者)로 인식됐다.
주(周)나라 시기에는 말 관리 제도가 초기 형태를 갖췄다. 당시 오직 주나라의 천자만이 여섯 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 있었는데, 동주(東周)의 수도였던 낙양(洛阳, 뤄양)에는 오늘날까지 ‘천자가육(天子駕六)’을 증명하는 마차 부장갱(坑)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왕실의 말을 관리하는 관직인 ‘교인(校人)’이 등장했고, 말 역시 종마(種馬, 번식용), 융마(戎馬, 군사용), 제마(齊馬, 의례용), 도마(道馬, 수송용), 전마(田馬, 사냥용), 노마(駑馬, 노동용) 여섯 종류로 세분됐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이르러 말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략적 자원이 되었으며, 한 나라의 위상과 힘의 크기는 천승지국(千乘之國), 만승지국(萬乘之國)처럼 마차의 수로 표현되었다. 그 외에도 제(齊)나라 전기(田忌)가 말을 겨룬 이야기와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천금을 주고 말을 산 일화는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된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전국에 치도(馳道)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말 중심의 교통망을 구축했다. 현재에도 시안(西安)에 가면 병마용 전마(戰馬)들의 위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한(漢)나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역(西域)에서 우량한 말 품종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 가운데 ‘한혈보마(汗血寶馬)’가 중원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 외에도 진시황(秦始皇)의 추풍(追風), 항우(項羽)의 오추(烏騅), 관우(關羽)의 적토(赤兔), 유비(劉備)의 적로(的盧) 등 모두 명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서기 64년, 한나라 명제(明帝)는 서역에 사신을 파견해 불법을 구하게 했고, 4년 뒤 사신들은 천축(天竺)의 고승을 모시고 백마에 42장으로 된 불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중국 최초의 관영 사원인 백마사(白馬寺)가 건립됐다.
당(唐)나라 시기는 말의 번식이 정점에 이른 시기로, 사람들이 준마(駿馬)를 귀하게 여기고 감상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당 태종(太宗)은 능묘에 ‘소릉육준(昭陵六駿)’이라는 석각을 남겨 여섯 필의 애마와 함께 영면했고, 당 현종(玄宗)은 음악에 맞춰 춤추는 말을 훈련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나라 시에는 말을 노래한 작품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두보(杜甫)의 <방병조호마(房兵曹胡馬)>, 이백(李白)의 <자류마(紫騮馬)>, 이하(李賀)의 <마시이십삼수(馬詩二十三首)> 등이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마구(馬球) 경기가 궁정과 민간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귀부인들이 말을 타고 나들이하는 모습 역시 장안(長安)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송(宋)나라 이공린(李公麟)의 <오마도(五馬圖)>, 원(元)나라 조맹부(趙孟頫)의 <곤진마도(滾塵馬圖)> 등은 말에 대한 옛사람들의 세밀한 관찰과 애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북송(北宋) 시기에는 민간의 말 사육을 장려하기 위해, ‘보마법(保馬法, 국가가 백성에게 말을 맡겨 기르게 한 제도)’과 ‘호마법(戶馬法, 특정 가구에 말을 분배해 관리케 한 제도)’이 시행됐고, <대원마정기(大元馬政記)>는 원나라 시기 군대와 민간을 막론하고 말 사육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明)·청(淸) 시대에 이르러 말은 더 민속적이고 상서로운 이미지로 인식되며, 세화(歲畫)·종이공예·자수의 주요 소재가 됐다. ‘마도성공(馬到成功, 말이 도착하자마자 승리를 거둔다는 뜻으로 일이 순조롭고 빠르게 성공함)’, ‘용마정신(龍馬精神, 용과 말처럼 왕성한 기운과 불굴의 기상)’과 같은 성어가 널리 퍼지면서, 말과 관련된 문화는 실용적 차원에서 상징적 차원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말과 관련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삼국사기>는 진한 6부 가운데 하나인 고야촌 인근에서 벌어진 신비로운 일화를 전한다.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울부짖자, 촌장들이 그 소리를 따라 숲으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말 대신 커다란 알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알을 깨자 아이가 태어났고, 훗날 이 아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됐다. 이는 한국에서도 말에 대한 원초적 신앙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고대에는 좋은 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준마는 국가 간은 물론 개인 간에도 예물로 주고받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368년과 434년에 각각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선물했다. 또 924년에는 견훤이 사신을 통해 왕건에게 절영도 총마(驄馬, 푸른 갈기와 은백색 몸통의 명마) 한 필을 보냈다. 그러나 2년 뒤 ‘절영도의 명마가 떠나면, 백제가 망한다’는 예언을 듣고 이를 후회해, 사람을 보내 고려에 말을 반환할 것을 요청했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 말을 돌려보내도록 허락했다.
신라 진평왕 때, 설씨 성을 가진 미녀가 있었는데, 가족이라곤 늙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군역을 위해 남성들이 징발되자, 설 씨는 연로한 아버지가 군대에 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깊이 고민했다. 그때 설 씨를 흠모하던 가실이라는 청년은 설 씨의 부친을 대신해 군역을 맡겠다고 자청했고, 이를 조건으로 설씨와 혼약을 맺었다. 떠나기에 앞서 가실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자 자신이 아끼던 말을 설 씨에게 맡겨 곁을 지키도록 했는데, 그 말은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증표가 됐다. 여러 해가 흐른 뒤 가실은 무사히 돌아왔고, 두 사람은 남은 생을 평생 함께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1296년 충선왕 왕장이 아직 세자였을 당시 원나라 황제와 태후, 그리고 진왕(晉王)에게 각각 백마를 81필씩, 총 243필을 바치며 진왕의 딸에게 혼인을 청했다. 고대 한국에 진정한 의미의 ‘백마 탄 왕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충선왕일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왕의 말안장과 고삐는 금과 옥이 박혀있을 만큼 사치스러웠으며, 기병이 타는 말 또한 나전(螺鈿, 자개)과 마노(瑪瑙, 석영계 보석)로 치장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말의 가치가 매우 높았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따르면 상등마를 바치면 면포 50필을 받을 수 있었고, 가장 값싼 하등 암말조차도 면포 20필의 가치가 있었다. 만약 호랑이나 표범이 국가 목장에 침입해 다섯 필 이상의 말을 죽이면, 목장 관리자인 감목(監牧)과 병마절도사는 장형(杖刑)에 처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 태종은 아끼던 백마를 세종에게 선물하며 깊은 부성애를 드러냈다. 문신 김춘택은 집에서 기르던 말이 산으로 달아나 사라졌음에도,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말이 있을 때는 잃어버릴까 봐 늘 걱정했지만 말이 없어진 뒤 오히려 근심이 사라졌으니 이것이야말로 화가 복이 되는 ‘새옹지마’의 이치라 생각했다.
<산림경제>에는 조선 시대에 마방(馬坊)을 짓거나 말을 살 때 길일을 택했으며, 좋은 말은 머리가 높고 얼굴이 갸름하며 귀가 작고 사람의 뜻을 잘 헤아리는 특징을 지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말과 관련된 문화가 이미 고대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천자가육’이 상징하는 위엄에서부터 ‘마도성공’의 상서로운 의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의 신라 시조 탄생 신화에서 조선 시대 ‘새옹지마’의 철학적 사유에 이르기까지, 말은 일찍이 가축의 실용성을 넘어 두 나라 문화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삶의 줄기이자 정신적 표상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말은 역사적 기억과 민족적 신앙, 그리고 인간적 온기를 함께 실어 나르며 중한 문화의 장대한 흐름 속에서 지금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