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1
푸저우의 골목과 거리 곳곳에는 무형문화유산을 통해 이어진 전통의 흐름과 서민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푸저우 사람들만의 독특한 일상미학을 그려낸다.

푸저우 싼산쭤 온천탕 내의 전통 대나무 침대식 의자의 모습이다. 사진/VCG
은은히 퍼지는 재스민 향
도시를 적시는 차의 여운
푸저우 거리를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사랑의 차탄(茶攤, 차를 파는 노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시민과 관광객 누구에게나 무료로 재스민차를 내어준다.
푸저우는 세계 재스민차의 발상지이자 주요 산지이다. 2022년에는 ‘중국의 전통 제다(製茶) 기술 및 관련 풍습’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되었고, 그 안에는 푸저우의 재스민 음제(窨製, 꽃 향기를 차 잎에 흡착시키는 가공 방식) 공법도 포함됐다.
사실 재스민은 본래 푸저우 토종 식물이 아니라, 바닷길을 따라 전해진 외래종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재스민은 서향·인동·석류꽃과 함께 인도 불교의 ‘4대 성화(聖花)’로 불린다. <복주다지(福州茶誌)> 기록에 따르면 재스민은 서한(西漢) 시기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푸저우에 전래되어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다. 북송(北宋) 시기에는 채양(蔡襄)의 <다록(茶錄)>에서 영감을 받은 푸저우 지부(知府) 가술(柯述)이 재스민차 제조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서 중화민국 시기 첫 전성기를 맞은 재스민차는 황제에게 바치는 최상품 차인 공차(貢茶)로서 그 명성을 널리 떨쳤다.
다시 찾아온 4월의 모내기 철. 이 시기가 되면 사자두(獅子頭) 재스민차의 7대 전승자인 웡원펑(翁文峰) 씨는 나룻배를 타고 민허우(閩侯)현의 모래섬으로 건너가 토양과 수분, 기후의 변화를 꼼꼼히 살핀다.
예로부터 푸저우의 재스민 재배지는 민장과 우룽장(烏龍江) 양안 및 하류의 사주(沙洲)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일대는 온화한 기후, 풍부한 일조와 강수량, 비옥하고 수분 함량이 높은 사양토 덕분에 고품질 재스민 재배에 적합한 조건을 갖췄다. “사자두 재스민차 특유의 빙탕(冰糖) 같은 은은하고 깔끔한 단맛을 내려면 반드시 이 일대 사주에서 자란 홑꽃 재스민을 써야 한다.” 웡 씨의 설명이다.
재스민차와 더불어 이어져 온 것이 바로 푸저우의 ‘차탄 문화’다. “어릴 적에는 사람들이 일을 마친 뒤, 차탄에 모여 주전자 가득 재스민차를 우려 놓고 대나무 의자에 기대앉아 담소를 나누고 평화(評話, 일종의 구연 예술)를 감상하곤 했다.” 웡 씨는 이렇게 말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옛 푸저우 차탄은 한동안 사람들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민속학자 팡빙구이(方炳桂)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2009년, 웡 씨의 차 가게가 새로 문을 열자 팡 씨의 제안과 지원 속에 ‘난셴(南仙) 차탄’이 꾸려졌고, 매주 한 차례씩 재스민차와 좌석을 무료로 제공하며 시민들을 맞았다. 팡 씨는 차를 마시러 모인 시민들에게 푸저우의 민속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난셴 차탄은 첫 회부터 큰 인기를 끌며 전통문화 애호가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됐다. 그때부터 이곳은 사람들이 무료로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강연을 듣거나, 일부 시민들이 즉석에서 평화나 민극(閩劇, 푸젠 지역 전통 연극)을 선보이는 등 사람들이 옛 푸저우의 정취를 찾기 위해 모여드는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2016년 차탄의 주요 강연자였던 팡 씨가 별세하자 웡 씨는 차탄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다행히 현지 문화·역사 연구자들과 민속 애호가들이 자발적으로 팡 씨의 강연을 이어받았다. 이후 난셴 차탄은 ‘차탄 온 에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개설해 강연 내용을 더 널리 전했고, 이제까지 200회가 넘는 방송을 진행했다. 이로써 옛 푸저우의 차탄 문화에도 새로운 시대의 활력과 숨결이 더해졌다.
웡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꾸준한 노력 끝에 ‘옛 푸저우 차탄’은 푸저우 제5차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포함됐다. 차탄은 다시 시민들의 일상으로 돌아와 사교와 여가를 위한 소중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뜨끈한 온천탕에서 느끼는 사람 사는 온기
푸저우의 구도심이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은 이른 아침. 구러우(鼓樓)구에 있는 싼산쭤(三山座) 온천 목욕탕에는 벌써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탕 안은 ‘첫 탕(그날 새로 받은 온천수)’을 즐기러 인근에서 찾아온 단골손님들로 북적였다. “목욕탕이 새벽 6시 반에 문을 열어서 시간에 딱 맞춰 왔더니, 사람들이 벌써 문 앞에서 줄지어 서 있었다.” 온천탕의 단골손님 천진(陳錦, 66) 씨가 웃으며 말했다.
푸저우 사람들은 온천을 ‘탕(湯)’이라 부르고 목욕탕을 찾는 손님들을 ‘탕객(湯客)’이라 칭한다. 또한 “온천 없는 삶은 푸저우 사람의 삶이 아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푸저우 온천욕의 역사는 문헌 기록만으로도 17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진(西晉) 태강(太康) 2년(281년), 진안(晉安)군(지금의 푸저우) 태수 엄고(嚴高)가 성을 쌓던 중 동문 밖 인공 운하(지금의 진안허·晉安河) 근방에서 온천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사람들이 목욕할 수 있도록 그곳에 돌을 쌓고 못을 만들라고 명했다.
당나라 시기에는 푸저우에 이미 ‘온천향(溫泉鄉)’이라는 지명이 등장했고, 북송 시기에는 관영과 민영 욕탕을 합쳐 30곳이 넘는 온천 시설이 성안에 자리했다. 온천에 몸을 담그며 건강을 돌보고 병을 치료하는 풍습도 널리 퍼졌다. 푸저우 온천이 황금기를 맞은 청나라 시기에는 성 안팎으로 30여 곳의 온천 분출구가 산재해 있을 정도로 온천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온천 욕탕은 서장(書場), 차탄과 함께 옛 푸저우 사람들이 즐기던 ‘세 가지 여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푸저우 방언에는 온천욕 후 개운하고 상쾌한 느낌을 가리키는 ‘터우자오(透腳)’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온천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붉게 달아오르고 뜨끈해진 뒤, 전신에 몰려오는 황홀함과 행복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탕에서 나와 튼튼한 대나무 침대식 의자에 노곤한 몸을 누이고 따뜻한 재스민차 한 잔을 마시면 그야말로 신선이 된 듯하다. 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항간에 떠도는 소문 등 단골 탕객들과 둘러앉아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는 그 자체로 큰 즐거움이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오르면 온천욕을 마친 싼산쭤 욕탕의 손님들도 하나둘 수건을 걸친 채 나막신을 끌고 느긋하게 햇살 속으로 걸어 나온다. 여기저기 그득히 고인 온천탕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나루터와 같다. 천년의 세월 동안 거리의 풍경은 수없이 바뀌었지만, 온천이 푸저우 사람들에게 건네는 삶의 온기와 따스함만은 여전히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