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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변려문과 한나라의 유물


2026-03-31      

난창 거리에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 전통 복장을 입고 행진하며 <등왕각서>를 암하면서 새해를 맞이했다. 사진/CNSPHOTO


간장의 물줄기는 도시를 가로지르고, 천 년 문화의 흐름은 홍도(洪都)로 모여든다. 관광 트램 ‘왕발호(王勃號)’는 당나라 문인 왕발의 작품 <등왕각서>의 시적 정취를 싣고 도심을 달리고, 해혼후(海昏侯) 무덤에서 출토된 금과 옥은 한나라의 숨은 이야기를 풀어낼 단서를 간직하고 있다. 난창은 천고의 변려문(騈儷文)과 한나라의 유물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는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등왕각, 천재 시인의 불후의 절창

난창의 역사적 흐름을 여유롭게 느끼고 싶다면, 수상 유람선 외에도 육상에서 운행하는 ‘왕발호’ 시내 관광 트램을 타보는 것도 좋다.


‘딩딩딩’ 맑고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고풍스러운 관광 트램 한 대가 천천히 정류장으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왕발호’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트램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왕발’로 변신해 있다. 푸른 도포에 넓은 소매의 당나라 복식을 차려입고, 핸들을 잡은 모습마저도 은은한 옛 정취를 풍긴다. 트램 내부 벽면에는 왕발의 생애를 기록한 액자가 걸려 있고, 해설사는 죽간 형태의 안내판을 들고 왕발이 붓을 휘둘러 명문을 지은 시대를 초월한 미담을 자세히 들려준다.


부드럽고 은은한 해설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왕발호’가 등왕각 앞에 천천히 멈춰 선다. ‘강남(江南) 3대 명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웅장한 누각을 올려다보면, 왕발과 등왕각을 둘러싼 오래된 일화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당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서기 675년) 중양절(重陽節), 홍주(洪州) 도독 염공(閻公)이 등왕각 중수 공사를 마친 것을 기념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원래는 자신의 사위 오자장(吳子章)에게 서문을 짓게 해 그의 이름을 알릴 계획이었으나, 연회 자리에 있던 한 젊은 나그네 왕발이 즉석에서 붓을 들어 글을 지었다. 이에 염공은 ‘참으로 천재로다. 마땅히 이름이 길이 남으리라!’라며 감탄했다. 즉흥적으로 탄생한 이 작품이 바로 ‘천고 제일 변려문’이라 칭송받는 <등왕각서>다. 전문은 773자에 불과하지만 37개의 고사를 담고 있으며, ‘인걸지령(人傑地靈)’, ‘평수상봉(萍水相逢)’ 등 40여 개의 성어를 파생해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의 언어생활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발은 <등왕각서>를 쓴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이 웅장한 작품은 그의 삶을 장식한 마지막 절창(絕唱)이 됐다.


이 불후의 명문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등왕각에서는 <등왕각서> 암송 시 입장료 면제 행사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2025년 초까지 13만 명 이상이 도전에 성공했으며, 어린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참여층도 폭넓다. 한 직원은 “지난번에는 산둥(山東)에서 온 두 살 반 된 아이가 이렇게 어려운 문장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 정말 대단했다!”고 말했다.


등왕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석양이 내려앉은 하늘을 가르며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이 보이고, 강물 위에는 부서진 금빛처럼 노을이 번져 내린다. 국어 교과서 속 문장과 천여 년 전 왕발의 눈에 비쳤을 풍경이 어느새 생생한 장면으로 되살아나 눈앞에 선명히 펼쳐진다.


왕발의 명작 <등왕각서>의 일부 구절 사진/VCG

 

해혼후의 묘, 다시 세상의 빛을 본 ‘지하 보물 창고’

간장 강변에서 이어져 온 문화의 맥은 시와 글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 땅 깊은 곳에도 묻혀 있다. 2011년 도심 북쪽 자금성(紫金城) 유적지에서, 놀라운 고고학적 발굴이 전설적인 한나라 귀족 해혼후 유하(劉賀)의 이야기를 2000년 만에 깊은 잠에서 깨워냈다.


유하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5세에 산둥에서 작위를 이어받아 왕에 봉해졌고, 19세에는 권신 곽광(霍光)에 의해 황제로 옹립됐으나 27일 만에 1127개 죄목으로 폐위됐다. 역사에서는 그를 ‘한폐제(漢廢帝)’라 부른다. 29세에 해혼후에 봉해져 난창으로 옮겨 왔으며, 33세에 쓸쓸히 생을 마쳤다. 2011년 그의 무덤이 발견됐고, 발굴 과정에서 1만 점이 넘는 귀중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묘역에서는 ‘지하 보물 창고’를 떠올리게 할 만큼 풍부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제금(馬蹄金, 말굽 모양의 금괴), 인지금(麟趾金, 기린 발굽 모양의 금괴), 금병(金餅) 등을 포함한 황금으로 된 유물의 무게만 115kg에 달한다. 오수전(五銖錢, 고대 중국의 동전)은 약 200만 개로, 무게로는 10t이 넘는다. 이 밖에도 청동기, 옥기, 칠목기는 물론 중요한 역사 기록을 담은 죽간목독(竹簡木牘, 대·竹와 나뭇조각에 글씨를 써서 엮은 책)도 다수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한나라 귀족의 사치스러운 삶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나라 시기 정치경제 제도의 중요한 축이었던 ‘주금제도(酎金制度, 조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금을 갹출하던 제도)’의 독특한 의미를 드러낸다. 그 역사적 함의는 단순한 금은의 실제 가치를 훨씬 넘어선다.


이 귀중한 보물들을 하루라도 빨리 다시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난창 한대 해혼후국 유적 박물관(南昌漢代海昏侯國遺址博物館)의 문물 복원실에서는 오늘도 복원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해혼후 묘에서 출토된 마제금 사진/VCG


복원가 왕위시(王雨夕, 28)는 복원팀 막내 팀원 중 한 명이다. 스탠드 조명 하나와 몇 자루의 붓, 여러 가지 안료와 가루, 사포는 그가 매일 사용하는 도구다. 그는 조심스럽게 붓을 들어 칠기 쟁반의 벗겨진 부분을 메운다. “가장 어려운 건 색을 맞추는 일이다.” 그는 “새로 덧칠한 색이 원래 색과 거의 완벽에 가깝게 같아지도록 하려면, 때로는 수백 번 색을 맞춰봐야 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 작업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옛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대화하는 일이다”라고 조용히 설명한다.


복원가 대부분은 복원에 필수적인 생칠(불에 달이지 않은 옻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왕위시의 작업대 위에는 피부염 연고가 상비돼 있다. “이 일은 기계가 절대 대체할 수 없다.” 그는 “한 점의 유물을 복원해 낸 순간, 그동안의 고생은 성취감과 행복감으로 바뀐다. 나는 이 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땅속 깊숙이 묻혀 있는 진귀한 유물들이 새 생명을 얻도록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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